
누정문화(樓亭文化)의 고향: 강릉
강릉은 산과 강, 그리고 호수와 바다가 어우러져 빚어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런 절묘한 풍광을 배경으로 강릉지방에는 누정문화가 이른 시기부터 꽃을 피웠다. 누정은 누각과 정자를 합친 말로 전통건축의 하나라 할 수 있지만 그 의미가 그리 간단하게 한정되지 않는다. 누정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그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건축물, 그리고 시문학이 조화를 이루는 전통적인 생활공간의 일부이면서 한편으로는 지방사회의 변화상을 담고 있는 강릉역사의 기초 자료이기도 하다.
강릉의 누정문화는 그 시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그 실물을 볼 수는 없지만 임해정(臨海亭)에 대한『삼국유사』의 언급과 한송정(寒松亭)과 관련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해 살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까지 한송정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화랑의 소요처(逍遙處)임을 명기하고 있다. 강릉에 누정이 융성하게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나말선초의 일이다. 이때는 누정의 건립과 중수를 관이 주도했다는데 특징이 있다. 유서 깊은 경포대(鏡浦臺)도 충숙왕 13년(1326)에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신(朴信)에 의해 중수된 것인데 파견된 지방관에 의한 누정건립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누정 건립은 민간주도적인 양상을 띠고, 재지사족들에 의한 경영이 두드러진다. 이때 건립된 누정으로 대표적인 것이 해운정(海雲亭)이다. 이 지역 재지사족으로 입신출세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낙향한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에 의해 건립된 해운정은 사방이 트인 이전의 정자와는 달리 사면 벽과 온돌을 갖춘 강릉 최초의 별당식 누정이다. 조선 후기까지 관에서 주도하여 누정을 경영하는 전통이 이어지지만 성리학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성장한 재지사족이 낙향하거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아도 부와 덕망을 갖춘 사족들이 누정문화를 향유하였다. 특히 19세기에 건립된 활래정(活來亭)과 같이 자신의 일상공간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정자도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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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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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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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래정
향교(鄕校)와 서원(書院)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적 근간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교육과 보급은 국가 경영을 위한 필수적인 사업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를 위해 관읍마다 향교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향교를 통해 지방민을 교화하고 성현을 받드는 유교의식을 주도하게 하였다. 조선조를 통해 향교의 교육기능이 무리 없이 수행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교관의 파견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중앙정부의 획일적이고 경직된 운영은 재지사림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관학인 향교 교육기능의 쇠락은 사학인 서원의 융성을 가져 왔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 후기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교육의 차원이라기보다 문묘의 제사가 그 주요한 기능이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5년(1313) 화부산(花浮山) 기슭에 건립되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릉향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태종 11년(1411)에 소실되어 2년 후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지만 그 규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원의 기능도 향교와 마찬가지로 유학의 강론과 선현의 제사, 이 두 가지를 겸한다. 다만 운영의 주체가 관이 아니라 재지의 사림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기능을 토대로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향촌질서의 중심축이 되어 왔다. 강릉에는 오봉서원(五峰書院), 송담서원(松潭書院) 두 곳이 있다. 오봉서원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서원으로 1556년 서장관으로 명에 갔던 칠봉(七峯) 함헌(咸軒)이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진영을 받아와 명종 16년(1562) 서원을 건립하고 봉안하면서 시작하였다. 사액서원은 아니었으나 숙종 때 위토 3결과 모속인 20명을 하사받아 운영되었던 규모가 큰 서원이었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긴 했지만 1914년과 1928년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송담서원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모시는 석천묘(石川廟)에서 시작되었다. 선조 24년(1592) 김경시(金景時)가 발의하여 공론화 되었으나 전란과 정쟁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인조 2년(1624)에 비로써 향론을 모아 건립할 수 있었다. 송담서원이란 명칭은 현재의 장소로 이건된 이후 얻은 것이고 16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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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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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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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