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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유적 토양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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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제작장(단양 수양개 유적)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한 도구는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이며 이것을 사용하던 인류 최초의 문화단계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석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쯤 처음 등장하는데 약 1만 년 전까지 인류가 사용한 도구는 주로 뗀석기였다. 그러므로 구석기시대는 인류사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00만년 전쯤의 일로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최초의 인과는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비례는 침팬지와 같은 유인원들과는 많이 닮았지만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의 동부 아프리카 일대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들이 석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인류 최초의 석기는 냇돌을 주어다 한쪽 혹은 양쪽에서 깨트려 날을 만든 매우 단순한 형태의 것으로 자갈돌석기 혹은 최초로 발견된 유적명을 따서 올두완(Oldowan)석기라고 불린다.
이 최초의 석기가 출현한 시기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alopithecus)보다 훨씬 인간 쪽으로 진화한 이른바 초기호모(Early Homo)가 나타났던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180만년 전쯤, 아프리카를 벗어나 열대와 아열대 지방으로 확산된 인류의 조상을 직립원인(Homo erectus)라고 부른다.
신체적인 조건에서 만큼은 현대인과 거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진화했지만 뇌용량이나 두개골의 형태는 차이가 많았다. 직립원인이 나타난 직후 170만년전에서 140만년전 사이에 석기 제작에 있어서 커다란 진보가 있었다. 이때 이른바 아슐리안(Acheulian)공작이라는 석기군이 등장하는데 그중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주먹도끼는 이후 백 만년 이상의 기간동안 꾸준히 사용되었다.
이 아슐리안공작이 지속된 시기를 전기구석기시대라고 부르며 이와 같은 석기문화를 통해 호모(Homo)속의 기술적 능력에서 중요한 발전을 인정할 수 있다. 즉 단순히 날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를 가진 석기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아슐리안공작 이전에는 돌을 깨트려 떨어져 나간 격지든, 몸돌이든 날을 가진 것이라면 끊고, 자르는데 임시적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호모에렉투스들은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등과 같은 일정한 형태의 석기를 만들기 위해 마음먹은 대로 일정한 크기의 돌조각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떼어내는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형화된 석기군이 100만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것은 형태와 제작기술을 전승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석기 형태의 모델이나 제작공정과 같은 것이 호모에렉투스의 마음속에 있어서 추상화된 의미 전달 수단을 통해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전기 구석기문화를 대표하는 아슐리안공작의 석기들은 이전에 비하면 훨씬 발달해 있었지만 정형성을 가진 석기는 여전히 크고 무거운 몸돌석기가 주류를 이루었고 석기의 종류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것은 아니었다. 호모속 중에서 훨씬 진화된 20만년 전의 인류는 격지석기의 생산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르발루아(Levallois)라고 부르는 이 기술은 몸돌을 몇 단계 가공하여 필요한 모양의 격지를 한번의 가격으로 떼어내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야 하는 기술이면서 몇 단계 프로그램화된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기술적 지능이 축적된 호모속에 의해 비로써 가능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기술은 호모 네안데르탈에 의해 개척된 중기 구석기시대 석기공작에 계승되어 작고 가벼우면서 능적으로 분화된 격지석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현대인류의 조상은 15만년전쯤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에 의해 후기 구석기공작이 시작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인류사 전개의 커다란 분기점이라는데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현생인류는 그들의 뛰어난 적응능력으로 전 세계로 서식처를 확대하였으며 돌날기술이라는 석기제작의 혁신적인 방법을 발전시켰고 정교한 골각기도 사용하게 되었다. 북반구 지역에 내습한 뷔름(Wurm) 빙하기 마지막 빙기의 혹독한 기후 속에서도 전문화된 사냥을 통해 환경과의 평형을 이루면서 생존하여 왔다. 기술·경제적인 진보는 사회적, 이념적인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 왔고, 그러한 발전의 누적과 함께 사회문화체계 각 부분의 상호작용은 이후 신석기시대 농경의 개시와 문명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돌날기술이란 잘 가공된 몸돌에서 눌러떼기 수법으로 좁고 긴 돌날을 연속적으로 떼어내는 수법으로 이렇게 생산된 돌날들은 간단한 2차 가공을 통해 창끝, 밀개, 새기개, 뚜르개, 칼 등 다양한 용도의 석기로 만들어진다. 석기제작의 효율성과 사용의 기능성에서 혁신적이라 할 만한 석기공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극히 소형인 이들 석기는 대부분 나무자루에 끼워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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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심곡리유적 출토 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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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개(동해 발한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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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구호동 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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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도끼(구호동 유적)
구석기시대 문화의 변천은 통상 석기제작기술의 변화를 기준으로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보게 된다. 연대측정과 구석기의 유형학적 연구가 체계화되어야만 그러한 시기 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특히 시기에 따라 석기의 정형화된 기술체계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석기제작 전통이 뚜렷이 구분되어야만 시기 구분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중·후기의 석기공작이 현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유럽과 비교했을 때,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단계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각 시기를 특징 지워주는 정형화된 석기유물군을 정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서는 후기를 제외하면 임시적인 기술에 의존하고 정교한 잔손질 기술이 거의 없으며, 석영과 같이 규칙적인 가공이 어려운 석재를 즐겨 선택했기 때문에 정형화된 석기제작의 전통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형적인 돌날기술이 확산된 후기 구석기시대를 제외하고서 특별한 석기가공 기술의 단계 설정이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 구석기시대는 돌날기술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 후기구석기공작에 비해 나머지 전기와 중기에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몇 가지 정형성을 가진 몸돌석기 조합이 특징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개 10만년전을 전후한 중부홍적세 말기나 상부홍적세의 초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을 전기로 하며 약 3만년전의 시기를 경계로 중기와 후기를 구분한다. 전기 구석기가 나오는 유적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를 비롯하여 강원도 동해안의 해안단구 유적 몇 곳이 있다. 전기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들은 불규칙한 편이지만 몇 가지 정형화된 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다면원구 등이 있다. 중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석기가 비교적 소형화되고 가공기술이 다소 정교해진 것 외에 전기 구석기시대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돌날석기 제작전통이 언제쯤 출현하여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3만년전쯤에 시작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후기 구석기시대는 2만년전쯤에 동북아시아 전체에 세석인-세석핵 기술이 확산되는 후반과 그 이전의 돌날석기 문화인 전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공주 석장리유적과 최대의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통하는 수양개유적은 전형적인 세석기가 출토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금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현대인류의 조상은 15만년전쯤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에 의해 후기 구석기공작이 시작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인류사 전개의 커다란 분기점이라는데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현생인류는 그들의 뛰어난 적응능력으로 전 세계로 서식처를 확대하였으며 돌날기술이라는 석기제작의 혁신적인 방법을 발전시켰고 정교한 골각기도 사용하게 되었다. 북반구 지역에 내습한 뷔름(Wurm) 빙하기 마지막 빙기의 혹독한 기후 속에서도 전문화된 사냥을 통해 환경과의 평형을 이루면서 생존하여 왔다. 기술·경제적인 진보는 사회적, 이념적인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 왔고, 그러한 발전의 누적과 함께 사회문화체계 각 부분의 상호작용은 이후 신석기시대 농경의 개시와 문명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돌날기술이란 잘 가공된 몸돌에서 눌러떼기 수법으로 좁고 긴 돌날을 연속적으로 떼어내는 수법으로 이렇게 생산된 돌날들은 간단한 2차 가공을 통해 창끝, 밀개, 새기개, 뚜르개, 칼 등 다양한 용도의 석기로 만들어진다. 석기제작의 효율성과 사용의 기능성에서 혁신적이라 할 만한 석기공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극히 소형인 이들 석기는 대부분 나무자루에 끼워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구석기시대 문화의 변천은 통상 석기제작기술의 변화를 기준으로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보게 된다. 연대측정과 구석기의 유형학적 연구가 체계화되어야만 그러한 시기 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특히 시기에 따라 석기의 정형화된 기술체계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석기제작 전통이 뚜렷이 구분되어야만 시기 구분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중·후기의 석기공작이 현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유럽과 비교했을 때,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단계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각 시기를 특징 지워주는 정형화된 석기유물군을 정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서는 후기를 제외하면 임시적인 기술에 의존하고 정교한 잔손질 기술이 거의 없으며, 석영과 같이 규칙적인 가공이 어려운 석재를 즐겨 선택했기 때문에 정형화된 석기제작의 전통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형적인 돌날기술이 확산된 후기 구석기시대를 제외하고서 특별한 석기가공 기술의 단계 설정이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 구석기시대는 돌날기술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 후기구석기공작에 비해 나머지 전기와 중기에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몇 가지 정형성을 가진 몸돌석기 조합이 특징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개 10만년전을 전후한 중부홍적세 말기나 상부홍적세의 초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을 전기로 하며 약 3만년전의 시기를 경계로 중기와 후기를 구분한다. 전기 구석기가 나오는 유적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를 비롯하여 강원도 동해안의 해안단구 유적 몇 곳이 있다. 전기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들은 불규칙한 편이지만 몇 가지 정형화된 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다면원구 등이 있다. 중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석기가 비교적 소형화되고 가공기술이 다소 정교해진 것 외에 전기 구석기시대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돌날석기 제작전통이 언제쯤 출현하여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3만년전쯤에 시작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후기 구석기시대는 2만년전쯤에 동북아시아 전체에 세석인-세석핵 기술이 확산되는 후반과 그 이전의 돌날석기 문화인 전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공주 석장리유적과 최대의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통하는 수양개유적은 전형적인 세석기가 출토되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