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지방의 철기시대 문화 연구는 취락유적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강릉지역은 특히 철기시대가 되면서 구릉상의 청동기시대 취락이 해안의 사구지대로 이동하여 입지한다. 이 지역 철기시대 집자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형의 呂자형 혹은 凸자형의 움집이다. 기본형은 장방형이며 움의 깊이가 깊고 넓으며 呂자, 凸자로 돌출한 부분은 일종의 문이 달린 출입시설이다. 주거지 둘레로 판자벽과 선반을 갖추고 있으며 주거지 중앙에 약간 치우친 곳에는 점토로 테두리를 하고 자갈을 깔아 만든 노지가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과 구조상으로 이전 시기의 청동기시대 후기 주거지와는 전혀 다르고 태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퍼져 있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상과 상통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강릉 안인리유적과 같이 여러 시기에 걸쳐 커다란 규모로 형성된 취락의 전모가 조사되면서 주로 주거지의 구조를 중심으로 영동지방 철기시대 문화의 기원과 변천을 논의해 왔다. 강릉에는 안인리 말고도 초당동과 강문동, 교항리, 동덕리 등의 사구지대에서 많은 수의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 영동지방 주거지의 구조적 변천을 보면 가장 오래된 형식이 장방형 주거지이고 그 다음 단계가 凸자형주거지, 그리고 呂자형주거지로 변천하다가 다시 凸자형주거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주거지의 평면형의 변천이 시기적인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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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안인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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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송정동 9호 주거지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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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동해 송정동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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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식토기와 타날문단지(양양 지경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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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 江門洞 遺蹟 (강릉 강문동 유적)
- 유적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문동
- 시기 : 철기시대
- 조사연도 : 1992년
강문동 유적은 초당동 유적과 인접한 지역으로 충적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동 유적은 1992년 9월 1일부터 9월 9일까지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철기시대의 주거지 1기와 완형의 적갈색 경질 무문토기 항아리, 다수의 토기편 등이 출토된 기원전 1~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노출된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은 북서-남동 방향이고, 장축 길이는 10.7m, 폭 6.2m, 수혈깊이는 35㎝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모래층 위에 진흙을 약 7~10㎝ 두께로 평평하게 깔아 다졌다. 내부시설로는 화덕자리, 기둥구멍, 숯기둥 및 판자가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바닥 곳곳에서는 많은 양의 기둥과 서까래로 보이는 숯기둥들이 나왔는데, 방향이 모두 북동-남서 방향으로 주거지의 장축 방향과는 반대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맞배지붕으로 추정되며 갈대 등으로 지붕과 벽체를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는 경질 무문토기 13점, 넓은 바리 1점, 토제·목제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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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 橋項里 遺蹟 (강릉 교항리 유적)
- 유적위치 :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
- 시기 : 철기시대
- 조사연도 : 1997년
강릉시 교항리 유적은 주문진 교항리 강원전문대 신축부지에서 발견된 철기시대 유적으로 동해에서 300m정도 떨어진 해발 7m 정도의 사구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범위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볼 때 현재 강원전문대학 운동장 지역에서부터 북쪽 신리천까지 이어지는 대규모의 철기시대 집단취락지로 판단된다.
교항리 유적에서는 B.C. 1세기~A.D. 2세기로 추정되는 철기시대 주거지 35기가 노출되었으며, 완형토기 30점과 수백 점에 달하는 토기편 및 방추차, 숫돌, 작업대, 발화석, 철제낫, 철제칼, 물레, 탄화된 목기 등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분 심하게 파괴된 채 발견되었으며, 그 중 8호, 9호 주거지는 중첩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특히 8호 주거지는 凸자형 평면으로, 크기는 남북 길이 9m, 동서 폭 6.7m, 움 깊이 60㎝로 불에 타서 무너진 벽체, 지붕구조(서까래, 종도리, 용마루보) 등의 탄화 목재가 원형 그대로 노출되어 철기시대 가옥구조가 동해안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완전하게 파악되었다.
또한 17호 주거지에서는 출입구와 주거지 바닥이 만나는 곳을 안쪽으로 좁히고 여기에 통나무와 진흙으로 단을 만든 후, 그 양 옆으로 진흙을 쌓고 그 속에 기둥을 세우는 출입구 형식이 발견되어 앞으로 철기시대 살림가옥의 복원은 물론,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가옥 건축발달사 연구와 촌락의 구조와 기능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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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 安人里 遺蹟 (강릉 안인리 유적)
- 유적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안인리
- 시기 : 철기시대
- 조사연도 : 1989년~1991년
안인리 유적은 동해에서 약 300m쯤 떨어진 군선강 북쪽 해발 7m인 사구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변에는 군선강과 석호인 풍호가 있어 동해안지방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사지형(砂地形)지역 중 하나이다.
동 유적은 1989년 12월 중순부터 1991년 6월말까지 발굴조사 한 결과 B.C 1세기~A.D 2세기의 철기시대 집단취락지로 보이는 마을유적으로 여(呂)자형 주거지13기, 철(凸)자형 주거지 14기 등, 주거지 33기와 4기의 파괴된 고분이 조사되었다.
안인리 유적에서는 두 집자리를 통로로 연결하는 여(呂)자형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며, 벽체로 사용했던 불탄 판자나 지붕을 엮었던 갈대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선사시대의 난방시설인 화덕이 온돌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긴 타원형과 아궁이형의 화덕이 출토되어 가옥발달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출토유물 중 철기의 자체제작을 알려주는 도가니와 전형의 타날문토기, 평양 낙랑지방의 회흑색, 흑색 토기가 출토된 점은 이 시대의 지역별 교류관계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 지방의 선사문화 및 전파 경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안인리 철기시대 유적은 한국 선사문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중요한 유적지임을 감안하여 유적지 내의 동-서로 뻗은 도로 남쪽지역은 보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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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 松亭洞 遺蹟 (동해 송정동 유적)
- 유적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송정동
- 시기 :철기시대
- 조사연도 : 1차 1999년, 2차 2000년
송정동 유적은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한 결과 60여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남쪽 전천에 이르는 철기시대 대규모 집단취락지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강원도에서 발굴조사된 13개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러한 대규모 취락유적은 조사 예가 적은 편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凸자형과 방형 및 소형유구인데, 철자형 주거지의 평면구조는 장방(방)형의 주거지 구조와 비슷하다. 단지 장방(방형)의 평면구조에 남쪽 단벽에 출입구가 붙어 있는 형태다. 출입구는 영동지방의 다른 유적에서 보이는 철자형 주거지의 출입구보다 비교적 넓게 마련된 점이 특이하다.
주거지는 장벽에 비해 단벽의 폭이 확대되면서 출입구쪽 반대편 즉 북쪽 단벽은 직선으로 축조되었고, 출입구쪽 단벽인 남벽은 八字 모양으로 벌어지면서 출입구와 연결된다. 수혈벽은 대부분의 판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수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소형의 방형유구는 벽체를 억새나 갈대 등으로 마감하였다. 바닥시설은 진흙을 단단하게 다져 놓았으며, 이때 저장용 토기들을 함께 묻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일부 주거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화덕자리는 점토띠식, 아궁이식, 무시설식 등이 조사되었다.
송정동 주거지에서는 백여점의 민무늬토기와 회청색 타날무늬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회청색 연질평저토기(낙랑토기), 민무늬토기 시루, 회청색 바리, 이형토기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출토되었고 철낫, 철촉, 철도자, 철부 등 많은 철기유물들이 출토되어 철기시대 토기 및 유물편년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며, 육로는 물론 해상을 이용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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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城 屯內 遺蹟(횡성 둔내 유적)
- 유적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둔내
- 시기 : 철기시대
- 조사연도 : 1996년
횡성 둔내 유적은 횡성군 둔내읍 둔방내리의 문화마을 택지지구 조성지역에서 강릉대학교 박물관이 1996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 동안 발굴조사한 결과 철기시대 주거지 5기가 조사된 기원 전후한 시기의 집단취락지이다.
이 유적은 강원 영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呂자형 주거지가 발견되어 강원 영동지방과 한강유역으로 연결되는 철기시대의 문화전파 경로를 밝혀 주는 유적지이다.
呂자형인 2호 주거지에서는 어깨선 안쪽으로 세워진 불탄 판자의 외벽에 진흙이 붙어 나온 것으로 보아 가옥 축조시 판자 외벽에 진흙을 발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 주거지 남동쪽의 작은 방과 연결되는 큰방 입구에서 노출된 기둥구멍과 소토는 양양 가평리의 呂자형 움집터에서도 발견된 것과 같이 큰방과 작은방의 연결통로 상면에 위치한 흙벽구조로 추정된다. 화덕자리(爐址)는 약간 북서쪽으로 치우쳐 나왔는데 장타원형으로 중도식(中島式)의 납작한 냇돌을 깔고 그 위에 얇게 진흙을 덮어 1차로 사용하였고, 2차로 3매의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세워 아궁이형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2호 주거지는 장시간 존속되면서 화덕의 형태가 변화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철도자, 토제가락바퀴, 옥, 다수의 민무늬토기 및 타날문토기 등이 있다.